가족이야기/순흥안씨

주요낙향지-시흥(始興)

sandaram 2011. 5. 28. 11:21

시흥(始興)

입향(入鄕)

8세조 양도공(良度公) 휘 경공(景恭)께서는 이태조(李太祖) 원년 1392년 9월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의 칭호를 받으시고 전지(田地) 70결(結)과 노비(奴婢) 7명까지 받으셨다.

양도공께서는 1421년 세종 3년1월10일 돌아가시어 지금의 서울 금천구(衿川區) 시흥동(始興洞) 산(山) 126의 1에 묘소를 모셨다. 당시는 금천(衿川) 백사동(栢寺洞)이라 했다.

한양 남쪽에 우뚝 솟은 것은 관악산(冠岳山)이고 이 산의 서쪽은 금천군인데 군의 북쪽은 백사동이나 동의 남쪽 산맥이 관악산으로부터 나오게 되었으며 봉이 날으고 용이 서린 듯 구불구불 이어져 뭉쳐 그치니 이곳이 지금의 묘소이다.

순흥에서 나셨고 순흥이 대대로 내려온 관향(貫鄕)이고 또 아버지되시는 문간공(文簡公)의 묘소를 1401년 태종 원년에 지금 연천군(漣川郡)에서 순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봉화(奉化) 문단(文丹)으로 이장까지 하셨으니 공의 묘소도 순흥으로 쓸 것으로 생각되는데 시흥에서 썼으니 시흥이 양도공께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태종때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사패지지(賜牌之地)라한다. 태종은 일찍이 왕세자로 있을 때 듣기를 사대부(士大夫)집안은 안종원(安宗源)과 우현보(禹玄寶) 두 집이라고 들었노라 말한적이 있고 우리 안문(安門)을 자주 치하(致賀)한 적도 있으니 이만한 땅을 내려 예우(禮遇)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도공의 아드님되시는 정숙공(靖肅公) 휘 순(純)께서는 백사동에 아버님의 묘소를 쓰시고 이곳에 내려와 복상(服喪)하셨다. 뿐만 아니라 이곳을 장차의 기지(基地)로 삼으시려는 생각을 가지셨으니 별장(別莊)을 지으셨다. 정숙공께서 호를 별서(別墅.竹溪)라 하셨으니 별장이란 말과 같은 뜻으로 혹시 여기 백사동의 별장을 마음에 두시고 호로한 것은 아닐까.

이렇다면 여기 별장은 정숙공이 자주 나아가 거처하시고 또 마음에 쏙 드는 정이 깃든 집이었을 것이다.

정숙공께서 1440년 세종 22년 병이 나시어 시흥 별장으로 오시어 내나이 70에 벼슬이 1품이고 자손들이 다 무사하니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

사람이 죽으면 일이 많으니 이제 先塋(선영)이 있는 시흥으로 나가 있다가 생을 마치겠다. 하신 것으로 보아 시흥의 별장은 가족이 항시 거처하던 집이요 장례를 치룰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넉넉한 집이었음을 알겠다.

시흥 금천 백사동은 왕이 하사한 땅으로 양도공의 산소가 있고 부조묘(不祧廟)가 세워지고 살림집이 세워져 정숙공부터 생활을 하시게 된 제2의 관향 같은 뜻 깊은 곳이 되었다.

시흥의 연혁(沿革)

경기도 서부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래는 고구려의 잉벌노현(仍伐奴縣)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곡양(穀壤)으로 고쳐서 율진군(栗津郡)에 속한 현이 되었다가 고려초에 금주(衿州)로 고쳐 불렀다.

성종(成宗)때는 단련사(團練使)를 두었으나 목종(穆宗)때 폐지하고 1018년 현종(顯宗) 9년에 수주(樹州)에 폐합하고 명종(明宗)때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1414년 이조 태종 14년 과천현(果川縣)을 통합해서 금과현(衿果縣)이 되었다가 다시 혁파하고 양주(楊州)를 합하여 금양현(衿陽縣)이 되었다.

1879년 고종(高宗) 16년에 금천현(衿川縣)으로 고쳐 부르다가 1895년 고종 32년에 군(郡)이 되었다.

1914년 부군(府郡)의 폐합시에 안산군(安山郡)의 월북(月北)과 성곶(聲串) 두면을 수성군(水城郡)에 할양하고 과천 안산의 두 군을 시흥군에 통합했다. 1935년 영등포지구를 서울에 합치고 1948년 다시 도림리(道林里) 번대방리(番大方里) 구로리(九老里) 등을 서울로 합쳤다. 그 후 또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시흥은 서울특별시로 속하여 지금의 시흥동이 되었다.

선영이 있는 이곳은 1960년까지도 시흥역에서 내려 경수(京水)도로를 벗어나면 논과 밭으로 이어졌고 낮은 구릉(丘陵)의 옆길을 약 15분정도 걸어야 인가에 당도할 수 있는 호젓한 곳이었다.

입향후의 변화

시흥은 이 때부터 순흥(順興) 다음 가는 우리 안문의 중요 거주지가 되었다. 10세조 영원군(寧原君) 4형제분(문숙공,소윤공,대사헌공)이 시흥에서 나시지는 않았지만 생활의 많은 시간을 시흥에서 거쳐하신 것으로 짐작이 된다. 선영을 살피고 제사를 받드는 일들이 시흥에서 이루어졌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물론 서울안에 본 집이 있었을 것이고 또 외직(外職)으로 지방으로 나가 계시기도 하셨지만 시흥은 우리 집안의 중심지가 되었다. 돌아가셔서도 이 곳에 묻히시기를 원하셨고 또 당연히 선영 곁에다 묘소를 후손들은 마련하였다.

11세조에 와서는 문숙공의 두 아들 참의공(參議公) 훈(訓) 참판공(參判公) 의(誼) 소윤공의 아드님 승지공(承旨公) 전(詮)과 대사헌공의 세 아들 목사공(牧使公) 겸(謙)과 판관공(判官公) 눌(訥) 회양공(淮陽公)  해(該) 여섯 분들은 시흥에서 대부분이 태어나시어 자랐고 시흥에서 공부를 하셨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형제간이고 또 4촌간의 밀접한 관계로 한 집 가족이란 관념을 가지셨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아무리 대가족제도인 사회체제라 하더라도 형제가 늘면 분가(分家)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니 11세조의 아들들이 장성하고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되는 바가 있어 시흥을 중심으로 멀지 않은 곳으로 나가 사는 분들이 생겼다.

12세에 와서 13명의 아드님들이 태어나셨는데 맏집인 참의공(參議公)의 아들 두 분은 지금 서울 도봉구 방학동(放鶴洞) 근처로 가셨다. 그런가 하면 참판공(參判公)의 네 아들중 세 분은 과천 남쪽 수리산 밑의 외가(外家)가 있는 곳으로 짐작되는 초막동(草幕洞)으로 이사를 가셨다. 이곳이 지금의 군포 산본리(山本里)이다.

'가족이야기 > 순흥안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집 가계도(家系圖)  (0) 2011.05.28
계담서원(桂潭書院)  (0) 2011.05.26
주요낙향지-충주파조 이담 입향내력 고찰기  (0) 2011.05.26
순흥안씨 家訓  (0) 2011.05.26
순흥(順興)의 변천사  (0) 2011.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