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 충주파조(順興安氏 忠州派祖)
이담 입향내력 고찰기(鯉潭 入鄕來歷 考察記)
순흥안씨제3파종보(1991년 제10호)에 게재된 낙향조 14대손 동준(東濬) 할아버지의 글임.
충주파의 이담낙향선조는 문숙공 증손중의 한분이시다.
휘는 훈(燻)이시고 관직은 어모장군부사과(禦侮將軍副司果)이시다.
공은 부친 판서공이 3 9세 되시던 해에 임지에서 4남으로 정미(丁未 1487)년에 출생하셨다.
그리고 사과공(司果公) 9세때인 갑인(甲寅 1494)년은 판서공이 수리산(修理山)으로 퇴거하신 해인즉 그해부터 아버님을 따라 과천 수리산(修理山) 기슭으로 이주해서 사신 것으로 배찰(拜察)된다.
이와같이 9세때부터 과천에서 아버님을 모시고 사셨을 사과공께서는 족보에 의히면 정덕(正德) 기묘(己卯)후에 철가하향(掇家下鄕)하여 隱居于忠州鯉潭云云하셨은듯 그 전에 전취(前娶)이신 계림정씨(鷄林鄭氏) 할머니와 결혼하셔서 일가를 경영하셨던 것으로 배찰(拜察)된다. 정덕(正德)은 명나라 년호이고 기묘년은 바로 조정암(趙靜庵)이 사사(賜死)받은 해(1519년)인바 이때 사과공의 년세는 33세이셨고 그 자제 첨지공(僉知公) 휘 충세(忠世)께서는 기사(己巳 1509년)생이시니 기묘사화때는 11세이셨다.
여기서 안항(安巷:大相洞司果公齋室所在谷名) 낙향선조의 배위년세를 살펴보면 사과선조께서는 정미(丁未 1487년)생이신데 계림정씨 할머니께선 경술(庚戌 1490년)생으로 사과선조보다 2세년하이시고 정해(丁亥 1527년)에 졸하셨은 즉 향년 38세이셨고 자제 첨지공(僉知公)은 19세이셨다. 정씨할머니가 졸하신 것은 사과공 41세시이고 후배이신 청주정씨(淸州鄭氏)할머니는 임신(壬申 1512년)생에 계유(癸酉 1573년) 졸이신 즉 62세장수를 하셨는바 후배로 들어오신 년대는 미지이나 정씨할머니께서 졸하신 정해(丁亥 1527년) 후에 들어오셔서 사과공이 졸하신 을미(乙未 1535년) 이후에도 무려 38년간을 홀로 계시어 손자 사촌공이 10세되실 때까지 자손들을 돌바주시다가 돌아가셨다.
위에서 고증해본대로 사과공께서는 과천에서 정씨할머니와 결혼하여 분가해서 사시며 생남(生男)하시고 그 자제가 11세되시던 해에 을미사화가 일어나자 掇家하셔서 이담으로 낙향하셨다고 기록되어있다.
여기서 좀더 구체적으로 상고할 것은 시과공 낙향전후의 상황이다. 사과공께서는 9세때에 관직을 버리시고 은거차 선영하로 이주하시는 아버님을 따라 과천 수리산하 시골로 가시어 부모님 슬하에서 자라나셨다. 그리하여 계림정씨의 따님과 결혼을 하시고 분가하여 사시면서 자제 첨지(僉知)공 휘 충세(忠世)를 낳으셨는데 33세 되시던 해에 조정암(趙靜庵)과 많은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심정(沈貞), 남곤(南袞) 등의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모략에 의해 사약을 받고 귀향을 가고 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바 이를 보시고 과천도 안주(安住)하실 곳이 못 된다 하시고 철가(掇家)하여 이담으로 낙향하셨던 것이다. 이때 아버님 판서공의 연세는 62세였고 자제 명지공의 연세는 9세 이셨다는데 철가라고 해도 부모님까지 모시고간 것은 아니라고 배찰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과천에서 이담으로 낙향하셨겠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담에 대한 예비 지식없이 무턱되고 짐을 꾸려서 출발하셨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결코 아니였던 것으로 배찰한다. 사과공의 아버님 판서공께서는 6세에 시서(詩書)에 능통하셨고 11세 되시던 무자(戊子 1468)에는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셨고 19세 병신년에는 사마시 진사과에 중(中)하셨고 22세때는 대과(大科)에 중(中)하시어 영평군수와 좌찬성에까지 오르셨고 성종(成宗)께서 25년 갑인(甲寅 1494) 12월에 승하하시자 뒤를 이어 연산군이 즉위하셨는데 이것을 보신 판서공은 느낀바가 있어 미련없이 관직을 자진사퇴하시고 과천 수리산 선영하(先塋下)로 가시어 은둔생활을 시작하셨다는 것은 전술한바다. 이때에 판서공의 연세는 38세였고 아버님 참판공이 졸 하신지는 벌써 27년이 지난 뒤였다. 판서공은 이와같이 조실고위(早失考位)하시고 편모(偏母)를 모시고 계셨다.
그러면 판서공의 이와같은 퇴관은둔(退官隱遁)의 용단은 어디서 나왔을까? 근안(謹按)컨대 고위이신 참판공의 교도(敎導)와 유훈(遺訓)도 그랬을 것이고 판서선조 자신도 폭군집권시는 재빨리 초야(草野)로 돌아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소신을 가지고 계셨을 것으로 배찰된다. 이와같은 지혜로운 결단은 호(號)를 지촌(智村)이라고 하신 것만 보아도 짐작이 가는 바이다.
한번 퇴거하신 공은 이후 다시 권유가 있었으나 응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초야(草野)에 계시더니 마침내 예견이라도 하신 것 같이 3년후인 무오(戊午 1498)년에 사화가 일어났다. 그 사화는 무오사화로서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삽입해 놓은 것을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등 훈구파들이 알고 이것은 세조(世祖)가 왕위 찬탈(簒奪)한 것을 비방한 것이라고 연산군에게 밀고하여 기(旣)히 사거(死去)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수많은 사림(士林)이 무고하게 피살당하거나 귀양가는 사화가 일어난 것이다.
만일에 판서공이 미리 퇴관하시지 않고 관직에 남아계셨드라면 틀림없이 사림파(士林派)로 몰려 죽음을 당하셨거나 귀양가셨을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다. 그러나 3년전에 취하신 판서공의 퇴관결행(退官決行)은 얼마나 현명하신 처사(處事)이신지 모른다. 이와같이 안광지배(眼光紙背)에 철(徹)하는 여지(慮知)를 가지신 판서공이 38세에 퇴관하시어 87세에 돌아가실때가지 47년간을 은거생활을 영위하시면서 무엇을 하셨겠는가? 동기간(同氣間)과의 우애와 9남매의 장래를 주도면밀하게 염려하시고 훈계하며 사셨을 것은 물론이다.
여기서 역대선조의 거필택린(居必擇隣)하신 주거지에 관해서 좀더 고찰해보면 5세 밀직제학(密直提學)선조께서 문정(文貞), 문경(文敬), 좨주(祭酒) 세 아들과 순흥 석교리(石橋里)에서 거주하셨던 것은 주문민공(周文敏公)께서 사현정비(四賢井碑)로 증명해 주신바이고 문정, 문간, 양도공께서 출사(出仕)하시던 여말(麗末)에서 태조3년말 한양천도까지는 개성이 도읍이었으니 선조들께서는 개경에 거주하시다가 환도(還都)에 따라 한성으로 이주하셨을 것으로 배찰한다. 그리하여 양도공이 졸(1421년)하시어 금천(衿川)에 사패지지(賜牌之地)와 부조묘를 받으신 뒤에는 정숙공(靖肅公)께서 제향관계로도 백사동(栢寺洞)으로 이주하셨을 것으로 배찰된다. 족보에 명기된 바로는 감사공의 증손이신 취우정 휘 관(灌)께서는 신해(辛亥 1491)년에 시흥 백사동에서 태어나시고 계미(癸未) 중종18(1523)년에 사화를 피하여 함안(咸安)으로 이주하셨다고 하셨고 동부사과공(同副司果公) 휘 부(溥)께서는 조정암(趙靜菴)의 기묘사화때에 남하하여 은불사(隱不仕)하셨다고 명기(明記)하신 것으로 미루어 세종3년 신축(辛丑 1421)년 이후 기묘(己卯 1519)년 사화까지는 정숙공과 감사공 및 그 자제들은 근여 백년간을 백사동 묘하에 거주하셨던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문숙공은 하세(下世)하시자 처음에는 산소를 장단(長湍)으로 모셨다가 6년후에는 파주(坡州)로 이봉(移封)하신 것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문숙공은 출생하시기는 백사동 본댁(本宅)에서 하셨어도 거주하신 것은 분가하셔서 백사동 이외지에서 거주하셨던 것으로 배찰되며 문숙공의 자제이신 참의공(參議公)도 산소를 당초에는 경기도 양주땅에 모셨다가 근착에 화성(현재는 오산 지곶동으로 이장)땅으로 옮겨 모셨고 참판공(參判公)과 자제 판서공의 산소는 과천 수리산(修理山)에 계신바 참판선조께서는 46세로 일찍 돌아가셨고 배위이신 파평윤씨 할머니는 79세까지 장수하셨는데 판서공의 외조이신 윤감찰공묘사(尹監察公墓祀)를 지우금(至于今) 외손봉사(外孫奉祀)로 받들어 내려오고 있는 것 등으로 미루어서 과천은 윤씨할머니 친정과 연관이 있는 곳으로 배찰된다.
한편 천자(天資)가 영명(英明)하셨던 판서공께서는 시서(詩書)쁜만아니라 역서(易書)나 산수지리(山水地理)에도 능통하셨던 것으로 배찰된다. 그것은 아무일 없는 평상시에 결연히 관직을 사퇴하신 운신(運身) 한가지만으로도 추찰(推察)되고 남음이 있다. 이와같이 비범하신 선견지명을 소지하신 지촌(智村)선조는 수리산하로 이거(移居)후에는 여세를 자손들의 안녕과 번행발전(繁行發展)에 전심치지(專心致之)하셨을 것은 추찰에 어렵지 않다. 그리하여 7자제를 경기일원과 충청좌우도의 만세번영지지를 골라서 정주토록 하시는 포부를 소지하고 계셨을 것도 추찰이 어렵지 않고 따라서 지촌공께서는 선영산소는 물론 자녀들과 가까운 친인척이사시는 곳이나 이주하실 곳은 사전사후 세밀하게 답사하시고 비교 검토하셨을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렇게 추찰할 때 넷째 자제 사과공께서 이담(鯉潭)으로 낙향 입주하심에도 사전에 충주지방과 괴산지방의 산세와 수세(水勢) 그리고 전답과 교통등등을 세밀하게 조사 분석하셨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담리에서 남한강 하류를 따라 약 20리를 내려가면 유씨(柳氏)가 대성으로 살고있는 팔봉(八峰)이란 곳이 있다. 전에 팔봉서원(八峰書院)이 있던 곳으로 산수경치(山水景致)가 수려하기로 이름난 곳이다.
필자는 그곳 유씨 촌로로부터 팔봉은 본래 안씨가 택한 곳이고 이담은 유씨가 정한 집성촌이었는데 중간에 잘못 바뀌었다고 하는 일화 한토막을 들은 일이 있다. 물론 이 말의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우리 선조들로부터는 듣지 못한 얘기다. 팔봉은 현재도 참으로 경관이 빼어난 경승지(景勝地)이다. 그런데도 그곳에 사는 대성(大姓)의 노인 중에는 그 선조로부터 들은 얘기라고 말을 한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안(按)컨대 이담이 팔봉보다 더 좋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500여년전에 이담을 낙향지로 정하실 때 지촌(智村)선조는 자제 사과(司果)공과 더불어 이담과 계담 대상동(桂潭 大相洞)을 몇 번이나 탐사하셧을 것이고 이담의 산수가 다른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자손의 만대영화(萬代榮華)땅임을 확신하시고 정하신 다음 믿고 사랑하는 4남 사과공을 보내시어 정주(定住)케 하신 곳으로 배찰된다. 한림공께서도 등과전에 과거 공부를 이담 삼촌댁에 오셔서 하셨다는 것이 문헌에 나타난 사실이다.
지금은 3개리(三個里)로 분구가 됐지만 전에는 계담 대상동이 모두 이담리에 포함되어 있었다. 3개동에는 사과공 후손들이 지금도 살고 있는데 이담에는 종손주택과 종회관이 있고 계담에는 문정공, 문숙공, 한림공, 사촌공, 세마공 5위를 배향한 계담서원이 복원돼 있고 대상동에는 두사충(杜思忠)이 소점(所点)했다는 9대장상지지(九代將相之地)가 있다는데 복인(福人)이 봉길지(逢吉地)로 사과공을 모신 자리가 그 자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판서공은 그것을 내다보시고 이담을 정해 주신 것이 아닌가 배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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