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씨(安氏)성(姓)의 유래(由來)
한국인의 족보 편찬위원회가 편찬한 한국인의 족보에 보면 안씨(安氏)는 문헌상에 109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6본(本)을 제외한 나머지 103본은 미고(未考)이다.
안씨(安氏)의 본성은 이씨(李氏)로서 서기 806년(신라 애장왕 7년)에 당나라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개성의 송악산밑에 정착한 이원(李瑗)의 아들 3형제가 서기 864년(신라 경문왕 4년)에 왜구를 평정한 공으로 안씨(安氏)를 사성(賜姓) 받았고 큰아들 지춘(枝春)은 방준(邦俊)으로 둘째아들 엽춘(葉春)은 방걸(邦傑)로 셋째아들 화춘은 방협(邦俠)으로 각각 개명하였다 한다.
그리고 방준은 죽산군에 봉해짐으로써 그 후손들은 죽산안씨(竹山安氏)가 되었고 방걸은 광주군에 봉해짐으로써 광주안씨廣州安氏)가 되었다.고 한다.
오류 내용 - 그러나 이원(李瑗)이라는 사람이 역사에 나오지 않는다. 허구의 이름이다. - 그러나 경문왕 4년에 왜구와 싸운 역사적 사실이 없다. - 그러나 죽산군(竹山君). 광주군(廣州君). 죽성군(竹城君)으로 봉군(封君)하였다는데 신라 경문왕 당시에 죽산. 광주. 죽성등의 지명(地名)이 없었고. 신라 당시 일반백성 에게 봉군하는 제도 자체가 없었으니 다 거짓이다. - 1700년대 후반에 나기 시작한 농서이씨설이라는 설을 기준으로 만든 안씨성의 유래는 고증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안씨 성(姓)씨의 역사가 아니다. 일반 사회에 유포되었던 설을 성씨의 유래로 표기한 자체가 문제이다. |
순흥안씨는 자미(子美)를 시조로 하였고 신죽산안씨(新竹山安氏)와 탐진안씨(耽津安氏)는 순흥안씨에서 분관(分貫)되었다.
신죽산안씨(新竹山安氏)와 탐진안씨(耽津安氏)는 순흥안씨와 전혀 관련이없다. |
또한 위의 안씨들과 세계(세계)를 달리한 태원안씨(太原安氏)가 있다.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순흥안씨는 당나라에서 오신 이씨(李氏)하고는 관련이 없이 시조는 자미(子美)이다 이렇게 쓰여져 있다.
그리고 우리 순흥안씨 족보보다는 198년후인 서기1744년에 발간된 죽산(竹山)안씨 동원보(同源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당(唐)나라의 헌종황제(憲宗皇帝) 원화(元和) 2년인 신라(新羅) 40대 애장왕(哀莊王) 7년에 중국(中國) 농서(籠西) 사람 이경(李瓊) 혹은(원:瑗), 이황(李璜) 형제분이 조선(朝鮮)에 나와서 개성(開城) 송악산(松岳山) 밑에 살고 있었는데 마침 광주(廣州) 사람들이 성주(城主)를 죽이고 난(亂)을 일으켜 나라가 위태로워 졌을 때 이씨(李氏) 형제가 그 난리를 평정시켰다 한다.
이에 국왕(國王)이 이들을 불러서 나라를 평안(平安)하게 한 공(功)으로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 치하(致賀)하고 형(兄)인 경(瓊)에게는 안씨(安氏)성을 사성(賜姓)하고 죽산군(竹山君)을 봉(封)함으로서 우리나라에 안씨 성이 있게된 유래이며 동생에게는 이씨(李氏) 성(姓)을 그대로 둔체 고성군(固城君)을 봉(封)하셔서 고성 이씨(固城李氏)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후 안경(安瓊)은 아드님 셋을 두셨는데 첫째는 지춘(枝春)이요 둘째는 엽춘(葉春), 셋째는 화춘(花春)이었으며 모두 덕(德)과 재주와 용맹(勇猛)이 뛰어났었다 한다.
신라 48년 경문왕(景文王) 3년인 갑신년(甲申年:864년)에 왜구(倭寇)가 난(亂)을 일으켰을 때 이 3형제가 난을 평정하여 나라가 평안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공을 높이 사 국왕이 3형제에게 사명(賜名:왕이 이름을 내려주시는일)을 하여 주셨으니 맏분 “지춘”에게는 방준(邦俊)이 라하고 죽산군(竹山君)을 봉(封)했고 둘째분“엽춘”에게는 방걸(邦傑)이라 하고 광주군(廣州君)을 봉(封)했으며 셋째 분에게는 방협(邦俠)이 라하고 죽성군(竹城君)을 봉(封)하셨다고 한다.
조작한 내용 - 그러나 경문왕 3년은 갑신년이 아니라 계미년(癸未年)이다.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 그러나 왜구(倭寇)가 난(亂)을 일의켰다는 역사적 사실이 없다. - 그러나 임금이 안씨성을 사명(賜名) 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없다. |
이로써 “방준” 죽산군은 죽산안씨의 시조가 되셨고 “방걸” 광주군은 광주 안씨의 시조가 되셨는데 “방협” 죽산군은 후손이 절세(絶世)되었는지 후손을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 그러나 864년에 죽산안씨가 창성되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1144년동안 인구가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17,357가구 총 56,051명뿐이다. 이상하지 않는가? - 순흥안씨의 공식적인 역사가 830여년밖에 안되는데 인구가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14만 5254가구 총 46만 8827명으로 안씨의 73.5%를 차지한다. - 순흥안씨가 압도적으로 많다는것은 순흥안씨의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 보다는 훨씬 더 오래된다는 얘기일것이다.(경주김씨 영분공파 9대손 김후덕의 배가 순흥안씨이다. 김의진의 자부. 경순왕 년보를 보면 서기 914년에 별빈 순흥안씨가 子 덕지(德摯)를 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흥안씨 시조공(자미)보다 연대가 앞선다. - 순흥안씨는 확실한 근거가 있는 역사적 사실에 의한 시조를 모시고 있다. - 그러나 우리 순흥안씨가 1546년 족보를 만들때 나타나지 않았던 안씨 성의 유래가 1744년 죽산안씨에서 족보를 만들면서 위와 같은 설이 나왔다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
이상의 기록을 볼 때 제일 처음 발간한 우리 순흥안씨의 족보(族譜)에는 안씨의 기원(起源)과 나라에서 성을 내렸다는 사성(賜姓)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우리 순흥안씨가 족보를 간행한지 198년후에 와서 간행된 죽산안씨의 족보에 처음으로 사성(賜姓)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여기에서도 순흥안씨도 사성(賜姓)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 믿을만한 기록물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한 우리 순흥안씨는 사성(賜姓) 안씨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2. 순흥안씨의 기원
우리순흥안씨는 고려 신종(神宗)때에 흥위형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군대벼슬) 정7품(正七品)을 지내시고 신호위상호군(神虎衛上護軍)으로 추봉(追封) 받으신 시조 자미(子美)께서 순흥(順興)에 옮겨 사시게 되어 계속 후손들이 그곳에 정주(定住)하게 됨에 이곳이 관향(貫鄕)으로 정하게 되었고 이분이 곧 우리 순흥안씨의 시조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순흥안씨 후손들은 시조(1세)를 자(子)자 미(美)자 할아버지라고 칭하며 모시고 있다.
그러나 시조께서 언제부터 순흥에 거주하시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연대는 자세히 알 수 가 없으며 시조(자미. 子美) 이전에도 우리 선대(先代)가 계셨을 터인데 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3. 순흥의 연혁
순흥을 고구려때는 급벌산군(及伐山郡),신라 경덕왕때는 급산군(及山郡) 고려초에는 흥주(興州),고려 성종 때는 순정(順政)이라 일컬었고 고려 현종 때는 안동부(安東府)에 소속되었다가 다시 순안현에 소속되었으며 고려 명종은 이곳에 감무사(監務事)를 두었었다.
고려 충렬왕의 태(胎)가 묻힌 후(1236)년에는 흥녕(興寧)이라 고쳤고 충숙왕의 태(胎)가 묻힌 후(1294년)에는 흥주로 승격하였으며 충목왕의 태가 묻힌 후(1337년)에야 지금의 이름인 순흥(順興)으로 고쳐지고 부(府)로 승격하였다.
근세조선 태종은 이곳에 도호부(都護府)를 두고 있었는데 세조 정축년(1457년)에 금성군(錦城君) 유(瑜)가 이곳에 살면서 부사(副使) 이보흠(李甫欽)과 단종(端宗) 복위운동(復位運動)을 꾀하든 일이 사전에 발각된 사건 때문에 부(府)를 폐부(廢府)하여 풍기군(豊基郡)에 예속(隸屬)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숙종 계해년(1683년)에 비로소 순흥부로 다시 복원되었다.
죽계(竹溪) 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순흥의 별호(別號)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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